할게 너무 많다. 너무 많아서 선택을 해야할 상황까지 와버렸다.
선택을 하면 또 선택이 기다리고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에는 끝이 없다.
우리는 태어나서 부터 ‘~하는것’ 부터 배웠다.
말하는법, 감정표현 하는법, 인사하는법, 공부하는법, 그림그리는법 등등
평생 무언가를 해야한다.
안다, 사실 인간이라는 동물은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한다.
그렇게 설계가 된 유기체이다.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계속해서 외부에서 자극이 일어나야 본인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다.
자극이 없으면 자극을 만들어서라도 본인의 존재를 인지하는게 인간이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인간은 가만히 있는 불빛도 스스로 동공을 움직여서 불빛의 존재를 확인한다.
신체 자체가 가만히 있지 못하도록 설계가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하고 해야한다는 강박에 쌓인다.
1초라도 쉬려고 하면 거부반응이 온다.
이런 비효율적인 시스템이 결국 우리 인류 문명을 빠르게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다.
인간이란 결국 죽을때까지 계속 생산을 하도록 설계된 동물이니까.
하지만 현재는 상황이 다르다. 구지 생산적인 것을 하지 않더라도 외부의 자극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엄지손가락을 밑에서 위로 올리는 아주 간단한 동작 하나만으로 새로운 자극을 계속해서 얻을 수 있다.
가성비가 너무 좋다.
단순히 엄지손가락을 “까딱” 하는것 만으로도 방대한 량의 정보의 자극이 뇌로 들어온다.
이 말도안되는 극강의 에너지 효율성은 하루종일 해도 질리지가 않고 체력적인 문제가 발생할 일도 없다.
그 “까딱”하는 엄청난 가성비 행동으로 얻은 정보는 뭔갈 해야한다는 심리적 작용으로 연결된다.
나도 여행가고 싶다. 저 카페 가고 싶다. 저거 먹어보고 싶다. 나도 보고싶다. 연애하고 싶다.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되고싶다. 재밌다.
정말 재밌는게 맞을까? 정말 그걸 보면서 행복감이 충족이되는걸까?
난 절대 아니라고 본다.
보는것만으로도 행복이 충족이 되었다면 왜 계속해서 보고 있는가?
부족하고 결핍이되어 있으니까 계속해서 보는거 아니겠는가?
행복은 커녕 오히려 뭔가를 하고싶다는 강박만 쌓이게된다.
해야하는건 끝도 없이 많다. 아니 죽을때까지 절대 다 못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죽을때까지 다 하고 못죽는다.
무조건 지는 싸움이다.
우리는 왜 뭔가를 해야한다는 강박에 쌓인걸까.
사실 하지않아도 크게 생존에 문제가 되거나 사회적으로 결려가 되거나 그렇지 않다.
실제로 나는 카카오톡과 모든 SNS를 탈퇴하였지만 외부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반대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뭔가를 하고 하는건 배우는데 하지않고 하지말아야 하는건 왜 안배우고 소홀히할까?
음악을 듣지않는 법, 침묵을 유지하는 법, SNS를 보지 않는법, 자극적인 포르노를 보는법.
생각해보면 우리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SNS를 시작하고 음악을 들었으며 자극적인 포르노를 시청하고 손톱을 물어 뜯기도 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인간은 외부 자극을 통해 지속적으로 본인의 존재를 인지하겠금 설계되었다는 사실이 우리가 따로 학습하지 않아도 스스로 외부자극을 찾고 하도록 설계되었다는것이 매우 놀랍다.
우리는 본인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는 외부 자극이 없으면 불편함을 느끼는 존재이다.
좋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으니 자극을 차단하고 신경계를 잘라버리는건 말도 안된다.
근데 다시한번 곰곰히 생각해보자. 우리가 과연 “외부에서 오는 자극”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까? 그렇다면 우리 선조는 그동안 어떻게 생존해 왔으며 어떻게 본인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을까?
사실, 답은 아주 간단한 실험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지금 당장 5분동안 눈을 감고 이어플러그가 있으면 이어플러그를 끼고 소리가 없는 환경에서 가만히 있어봐라.
본인 온몸의 신경 자극이 느껴지고 뇌가 말하는 이야기가 들릴것이다.
100% 뇌는 이렇게 소리치고 있을 것이다. “눈을 떠! 귀를 열어! 답답해!!”
축하한다. 방금 당신은 처음으로 뇌가 말하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어떤가, 외부 자극이 없으니 아무도 듣지 못하는 본인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았나?
사실 우리의 내면의 소리는 그동안 줄기차게 소리를 질렀다.
듣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 않은건 본인이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으며 출퇴근을 하고 핸드폰을 보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자극적인 미디어를 보며 자는시간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뭔가를 듣고 뭔가를 본다.
그렇게 내면의 소리를 들을 시간은 외부 자극에 의해 묻히고 만다.
수만은 센서를 통해 외부 자극을 읽어 들이는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이제 내면의 소리를 듣자.
내면의 소리도 내면의 자극 중 하나라 우리의 존재를 인지하는데에는 문제가 없다.
사실 외부적 자극이든 내부적 자극이든 우리 뇌는 자극만 있으면 본인의 존재를 인지하는데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그동안 우리는 외부적 자극 요인에 자극을 빼앗긴 것이고 그게 익숙하고 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그동안 우리가 무언가를 열심히 한건 뇌 입장에는 크게 의미가 없다.
없어도 뇌에서 받아들이는 자극에는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될 이유와 명분을 확고히 정립했다.
SNS 안해도 된다. 음악 안들어도 된다. 자극적인 영상 안봐도 된다.
앞으로 그 시간을 내면의 소리를 듣는 시간으로 치환해라. 내면이 그동안 하고싶었던 말을 귀담아 듣고 실천하고 행동해라.
“~하지말라면서요. 안해도 된다면서요”
외부의 소리와 달리 내면의 소리는 본인의 생존을 위해 진심어린 말을 내뱉는다.
내면 본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진심어린 말을 본인에게 전하기 때문이다.
그게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간단한 해결책이다. 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아니 본인에게 있었다.
앞으로는 “~하기” 보다 “~하지 않기”도 실천해보고 연습해보기 바란다.
죽지 않는다. 아니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꼭 선행해야할 연습이다.
만약 본인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원한다면 내면의 소리를 듣기 바란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내면의 소리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